나의 여행 기록/'프랑스'에서의 3개월

[프랑스|파리|몽마르트]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물랑루즈 (2/2)

parkindresden 2026. 3. 8. 04:50

  늘 낭만적이었을 것만 같은 몽마르트의 역사는 사실 훨씬 드라마틱하다.  

서울의 남산과 비슷한 상징성을 가지지만, 높이는 절반 정도인 그리 눈에 띄지 않는 낮은 언덕이다. 그러나 파리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곳으로, 오래전부터 포도밭과 곡물을 빻기 위한 풍차가 있던, 파리의 뒷마당에 있는 작은 텃밭과 같은 곳이었다.

19세기 중반, 나폴레옹3세 시절 오스만 남작이 주도한 ‘파리 대개조’ 사업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도심에 거주하던 영세민들이 파리 외곽 몽마르트로 밀려나오게 된다. 모네와 르누아르와 같은 가난한 예술가와 문인들도 세금(특히 술에 부과된)과 규제가 적어 저렴했던 월세를 찾아 들어오면서, 이전부터 있던 자유로운(보헤미안, Bohemian) 정신과 함께 새로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분위기는 고흐와 피카소로 이어지면서 아직도 자유로움과 낭만을 꿈꾸는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단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의 몽마르트는 1871년 ‘파리 코뮌(Paris Commune)’으로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1789년에 프랑스혁명으로 자유와 저항의 시민정신이 시작되었고, 산업혁명(18세기말~19세기 중반)으로 중산층이 늘어나며 유럽은 왕정의 약화와 새로운 문화, 사상의 용광로가 되어 가고 있었다.

1871년 프러시아에 패한 나폴레옹3세가 폐위되고, 들어선 임시정부는 몽마르트에 있는 시민군의 대포를 회수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파리 시민들은 왕당파가 주류인 임시정부에 반기를 들어 몽마르트에서 ‘파리코뮌’을 구성하고, 정교 분리와 노동자 권리, 여성의 권리를 내세운 최초의 노동자 자치 정부를 세운다. 파리코뮌은 72일간 정부군과 대치하다가, 1~2만명이 살해된 ‘피의 일주일’을 거치며 그 꿈이 좌절되었지만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영향을 주고, 이후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혁명의 청사진이 되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현대의 대표적인 두 이념인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 모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피의 주간 동안 루이즈 미셸과 30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부대 + 리볼리 거리를 방어하는 파리코뮌 /wikipedia

 

형식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선 가방 검사를 받아야 한다. 줄이 긴 것에 비해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크레쾨르(Sacre-Coeur, Sacred Heart of Paris)’는 카톨릭 성당이다. 대부분 고딕 양식인 파리의 성당들과 다르게 종교적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비잔틴 양식으로 1914년 완성되었다. 

정교 분리를 주장한 파리코뮌의 발발지인 몽마르트에 성당을 건설해 혁명의 기운을 누르고 종교의 권위를 세우고 싶어했던 임시정부의 카톨릭과 왕당파가 카톨릭 신자들의 성금을 모아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완성하는데 40여 년이 걸렸다.  

성당 외벽은 ‘샤토 랑동(Chateau-Landon)’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특이하게도 비를 맞으면 ‘칼사이트(Calcite)’가 표면으로 나와 굳으며 건물을 청소하듯 하얀 외관을 자연적으로 유지한다. 

엄숙한 그리스도의 가슴 중앙에 ‘성심(Sacred Heart)’이 눈부신 성당안 중앙 천정화는 황금빛 모자이크 조각들이 빛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 모자이크이다.    

성당 왼쪽으로 돌아 서쪽에 돔으로 오르는 입구가 있다. 따로 티켓을 사야 하지만 의외로 사람이 적다. 좁은 계간을 올라 어찌 이리 설계했는지 놀랍게 복잡한 건물 사이의 좁은 오르막을 여러번 거쳐 성당의 끝에 오르면 파리의 가장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에펠탑과 라데팡스로 이어지는 탁트인 스카이라인이 볼만하다.    

해지는 성당 앞 계단에서 파리의 전경을 바라보며 버스킹을 잠시 듣고, 퓌니쿨레르 옆 낙엽이 깔린 긴 계단을 내려온다. 고즈넉한 정취, 19세기 파리의 낭만적인 쓸쓸함에 잠시 젖어본다.   

사크레쾨르(Sacre-Coeur, Sacred Heart of Paris)

 

  낭만은 퇴폐를 수반하는가. 

‘물랑루즈(Moulin Rouge)’가 인근에 있다. 이제는 밀을 제분하는 데 쓰이지 않지만 남아 있는 두 번째 풍차다. 니콜 키드만 주연의 뮤지컬 영화로 더욱 우리에게 친숙해졌다. 지금도 80여 명의 무희들이 연간 60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다. 진한 붉은색 풍차는 멀리서도 눈에 띈다.

환락의 거리임에 틀림없다. 물랑루즈 공연을 보러가는 길가에는 성인용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북적이는 거리는 밝고 지나다니는 관광객들의 표정들은 너무나 천진하다.  

진한 붉은색의 정열적인 벨벳 벽지와 카펫으로 덮힌 입구에 들어서면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의 포스터들이 마중해 준다. 새로운 경험이 기대된다.

하나라도 더 넣기 위해 촘촘하게 배열된 테이블 좌석 사이를 미로처럼 지나 안내원이 알려준 하얀 테이블보를 덮은 2인용 탁자는 스테이지 바로 앞이다. 객석의 천정은 노란색의 옛 유랑극단 천막처럼 꾸며 놓았다. 음료를 시켜놓고 가까운 내 자리가 좋을까, 아니면 먼 테이블이 나을까 견주어 본다. 어쨋든 가까이 볼 수 있으니 좋은게 아닐까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쇼가 끝나고 나서는, 목은 아팠지만 무대가 좁아 무희의 숄이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춤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고 자랑한다.

 

라스베가스 스타일의 깃털 장식이 화려한 남녀 무희들이 여러 주제로 집단 춤을 선보이고, 난이도 높은 롤러스케이트(아이스 스케이트 대신) 페어 댄싱이나 수영장이 중앙 무대에서 올라오는 수중쇼, 아크로바트 공연으로 중간중간 지루해지는 관객을 다시 잡는다. 물론 캉캉 춤도 빼먹지 않고 보여줬다. 

계속 옷이 바뀌고, 무희들의 열정, 그리고 톱리스… 즐겁지만 미안하게도 계속되는 숨가쁜 춤이 가끔 지루해 지기도 한다. 19세기 캉캉 춤은 속바지만 보여주어도 순진한 귀족들이 유혹당했겠지만, 현대의 우리는 그렇게까지 순진하지 않다.  

1889년 부터 시작되었다. 한창 전성기엔 캉캉 댄스의 효시로 알려진 최고의 무희 ‘라 굴뤼(La Goulue)’가 관객으로 온 영국 왕세자(Edward VII)에게 “헤이 웨일즈, 샴페인은 내가 쏠게!” 라며 호기를 부릴 정도였다. 1900년에 열린 세계박람회는 퇴폐적인 밤 문화를 다른 나라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비디오, 물랑루즈 내부] https://youtu.be/2C8FQzFR7tw

 

물랑루즈 (Moulin Rouge)

 

쇼는 끝나고 늦은 밤 파리의 거리에서 방향을 잃은 우리는, 영화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의 오웬 윌슨처럼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 속으로 한참 동안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낭만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