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 기록/'프랑스'에서의 3개월

[프랑스|파리|루브르] 루브르 박물관 - 드농관의 그림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들 (3.2/5)

parkindresden 2026. 2. 7. 08:14

  모나리자가 있는 방에서 나오면 좌/우로 연결된 [room 700]에는 ‘낭만주의(Romanticism)’, [room 702]에는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작품들을 모아 놓아, 양쪽 방을 오가며 같은 시대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두 흐름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수십여 점의 작품 중 보고 싶었던 5개의 작품과 시간을 보내고 점심 먹으러 간다. 🥪🥐☕ 

 

메두사호의 뗏목(The Raft of Medusa) /wikipesia

 

#  ‘메두사호의 뗏목(The Raft of Medusa)’은 [room 700]에 있다.  

식민지 개척을 위해 서아프리카 연안을 항해하던 Medusa호가 암초에 걸려 1816년 난파했다. 

무능한 선장과 상위층은 자기들만 살겠다고 몇 되지 않은 구조선으로 탈출하면서, 150여 명의 하급 선원과 가난한 정착민들이 급조해 타고 있는 작은 뗏목과 연결한 밧줄을 끊었다.

그렇게 버려진 13일간의 표류.

150여 명 중 15명만이 구조되어 뗏목 안의 처참했던 상황이 전해졌다.

 

1819년, 제리코(Theodore Gericault)는 생존자를 만나고, 뗏목을 만들고, 시체들을 연구하며 아스팔트 재료인 역청(bitumen)과 산화납을 사용해 독특한 어둠을 그려냈다.

그림 속, 한 줄기 햇살에 드러난 포기와 절망과 상실과 체념의 모습.

돛에 걸린 바람이, 멀리 보이는 배와 반대 방향으로 뗏목을 밀어내는 긴박한 순간 삼각 구도의 맨 위, 붉은 천을 처절하게 흔드는 가장 낮은 계급의 흑인.

그의 청색 바지와 그 사이에 또다른 하얀 천으로 삼색기를 만들어, 실패한 공화국에 대한 희망을 다시 갈구 하는 듯하다. 

이후에도 두번의 혁명을 더 거쳐야 했던 프랑스 민중들은 제리코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몹시 불편하고 힘들다.

 

나폴레옹 유배 후 1815년 다시 등장한 부르봉 왕정은 복귀 1년 만에 발생한 귀족과 기득권층의 부패와 무능과 비도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사건을 다시 상기시키는 제리코의 이 작품이 맘에 들지 않았고, 신고전주의가 주류였던 당시에 시체와 피가 난무한 새로운 그림에 대한 저항으로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은 평가가 엇갈렸다. 

외숙모와의 불륜, 반복되는 좌절로 방황했던 시기에 그려진 제리코의 초상화(뉴욕 메트로폴리탄)에는 재능을 짓누르는 삶의 고뇌가 묻어있다. 

말을 좋아해서, [room 700]에 있는 제리코의 다른 작품들에 기병이 많지만, 낙마 사고와 그에 따른 병으로 32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제리코 이후, ‘순수’라 부르던 이상이 아닌, 살아있는 ‘현실’속으로 들어가는 그림이 시작되면서, 낭만주의가 시작되었다.      

 

이차대전시 화재와 약탈을 피해 피난할 때, 다른 그림들은 둘둘말아 이동이 가능했지만 역청으로 그린 이 그림은 접을 수가 없어서 트럭에 그대로 실었고, 당시 파리 시내 전차의 전선등을 피해 이동하느라 단전등 어려움이 많았다는 일화가 있다.

 

 

  몇개의 작품을 지나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앞에 선다. 

한쪽 가슴을 내놓은 여신의 모습, 고대 로마 시대 자유를 얻은 노예가 쓰던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다양한 민중을 이끌며 혁명의 상징이 된 프랑스 자유의 여신 마리안(Marianne)의 모습은 일년 전 1830년 7월 혁명으로 부패한 부르봉 왕가(샤를 10세)를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를 이끌어낸 파리지엔에겐 뜨거운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는지, 새로 즉위한 입헌군주 루이 필리프는 살롱전에 나온 이 작품을 바로 구매해 창고에 넣어 버렸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wikipedia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과 유사한 삼각형 구도에 '승리의 여신'과 비슷한 자세와 그리스 튜닉과 유사한 옷을 입은 마리안은,

정리하지 않은 겨드랑이 털, 먼지 섞인 땀으로 얼룩진 가슴과 상기된 얼굴로 쓰러진 시체들을 넘어 한 손에 총검을, 다른 손엔 삼색기를 높이 치켜들고, 결의에 찬, 거칠고 역동적인 혁명가의 모습으로 전진한다.

왼쪽에 학생, 그 옆에 부르주아, 오른쪽에 권총을 든 어린 도시 노동자, 멀리 노트르담 성당 종탑 위에, 점처럼 작은 삼색기가 펄럭인다.     

 

자유, 평등, 박애의 삼색기를 들고 부당함에 저항해, 신분 사회와 왕의 시대를 끝낸 현대 국가의 시작점에 프랑스의 시민혁명이 있다. 

프랑스가 민중의 자유를 찾아 온 과정은 길고도 험난했다. 

루이16세를 폐위시킨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퇴색되고, 유럽 연합군에 패배한 나폴레옹 유배 후 외세의 힘으로 복귀한 부패한 부르봉 왕조를 물리치기 위해 1830년 7월 혁명을 해야했다. 이후 입헌군주 루이 필리프 치하의 부패로 프랑스는 다시 좌절했고 1848년 2월 혁명 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왕정을 복구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게 패한 후에야 1875년 드디어 왕정이 완전히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설 수 있었다.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으니, 

최소한 조국을 위한 그림이라도 그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완성해 1831년 살롱전에 출품한다.

 

 

  제리코가 문을 연 짧은 낭만주의를 꽃피운 들라크루아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또 다른 대작이 맞은편에 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The Death of Sardanapalus) /wikipedia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The Death of Sardanapalus)’,

1827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으로 전해진 사르다나팔루스가 죽기전 자기 소유의 후궁과 동물들을 살해하고 보물들을 태워버리는 장면을 그렸다. 

대부분 낭만주의 그림이 그렇듯, 그 처참함에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다만 커다란 붉은 침대를 가운데 두고 흰 옷으로 잔인함을 감춘 왕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병사에게 살해되는 후궁을 바라보고 있다. 

침대 주위로 그려진 죽음의 공포와 파괴, 극단적인 순간에 나오는 인간의 광기가 화려한 색채와 격렬한 움직임으로 기분 나쁘게 뿜어 나오며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이 그림이 상기시키는, 한 사람이나 집단에 집중된 권력의 폭력과 광기는 지금도 세계의 도처에서 진행 중이고, 멀지 않은 과거의 우리 기억속에서도 생생하다.   

루브르 박물관은 더 극적으로 우리를 자극하기 위해 이 방의 벽색을 짙은 붉은색으로 칠한 것 같다.

 

 

  지친 멘탈을 끌고 [room 702]로 들어간다.        

모나리자만큼은 아니어도, 지나가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몰려 있는 그림이 있다. 

# ‘나폴레옹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Napoleon)’. 

6 x 10 미터의 엄청난 크기로 그림 바로 앞에서 전체를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친절한 루브르는 맞은편에 대형 거울을 만들어 주었다.

거울 앞에 서면 우선 전체 그림이 편안한 크기로 보인다. 한쪽으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면 마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관식에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 깜찍한 설치 미술이다.  

1804년, 스스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다비드에게 대관식을 그려 줄것을 의뢰하고 3년에 걸친 작업은 1808년 살롱전에 전시 되었다. 

150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넣은 이 그림은, 로마 교황까지 초대해 왕위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한 권위와 위엄이 가득한게 한눈에 느껴진다.

누구나 처음 보면 “와” 소리가 난다. 

맞은편 대형 거울에 비친 '나폴레옹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Napoleon)'
나폴레옹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Napoleon) /wikipedia

정치적 목적을 담은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나폴레옹은 여러번 다비드의 작업실을 찾았고 그만큼 여러 각색된 부분들이 그려졌는데; 

실제 나폴레옹은 기껏 참여한 교황이 머쓱하게 스스로 왕관을 썼고 그림에서는 나폴레옹이 왕관을 왕비에게 씌어주려는 것으로 표현한다.

두 아이를 데리고 나폴레옹과 재혼한 6살 연상의 왕비 조세핀이 마음에 들지 않은 시어머니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림의 중간 회랑에 인자한 얼굴로 앉아 있다. 

20대의 얼굴을 한 40이 넘은 나이의 조세핀, 평균키의 나폴레옹은 실제 보다 크게 그렸다. 

뒤에 앉은 교황은 심기가 불편했음에도 손으로 축복을 내리고 있다.  

두 번째 회랑, 왼쪽에서 두 번째 화폭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다비드이다.

 

신고전주의 회화의 정점을 이루었다고 평가되는 다비드(Jacques-Louis David)는 프랑스 혁명과 왕정 복구가 반복되던 격동의 시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정치 변화에 따라 투옥되는 등 시련이 있었지만 여러 역사적 장면들을 화폭에 담았다. 

나폴레옹이 유배된 후에는 스스로 프랑스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처음 그림을 대하면,

멀리서도 빛을 내는 색채의 화려함과 압도적 규모, 이상적으로 정돈된 우아함에 감탄하게 되지만, 오래지 않아 신문의 정치면 사진을 보는 듯 몰입감이 떨어지며 그림 보다는 인물 찾기를 하게 된다. 

조금 전 지나친 감정이입으로 불편하게 했던 낭만주의 작품을 보아서인지, 현실 밖 이상적 세계의 신고전주의 그림은 몰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 앞에 거울을 놓았는지 모르겠다.

 

 

  같이 전시된 다비드의 여러 작품 중 

#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of Madame Recamier)’이 눈에 들어온다.

살롱의 여주인이자 당시 가장 유명한 사교계의 여왕으로, 여러 화가와 조각가의 모델이 되었다. 

레카미에 부인이 S자형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의자에 기대어, 뒤돌아보는 모습은 초기 붓터치가 남아 있는 미완성이지만 절제된 자태가 우아하다.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Portrait of Madame Recamier) /wikipedia

 

  이방에는 다비드의 제자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의 작품도 여럿 있다.

그중 시선을 잡는 그림은 1814년 작품 # ‘하렘의 여인(Grande Odalisque)’이다. 

술탄의 시녀를 뜻하는 Odalisque는 당시 잘못 알려진 동양의 신비함을 나타내는 대상으로 오리엔탈리즘으로 불리는 동양적인 소품들과 푸른 커튼을 더해 의도적으로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 그림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건 그런 신비감에 더해, 비너스의 S자형 몸매를 연상시키는 우아한 곡선을 위해서 척추가 서너개 더 있는 듯 길게 늘인 등과 뒤돌아보는 여인의 당당함이다. 

여인의 모습은 위에 다비드가 그린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등만 길어져서 인지 기이하다. 내게만 그렇게 보이나? 

하렘의 여인(Grande Odalisque) /wikipedia

 

  이제 지친다. 다리도 무겁고 허기도 지고. 

[room 700] 계단 옆에 튈르리 가든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카페가 있다. 

줄은 좀 길어도 운 좋게 창가 자리를 잡아, 차가운 잠봉 샌드위치와 다이어트 콜라가 꿈같다. 

빼곡이 장식된 5미터 이상 될 듯한 높이의 천장과 기둥으로 여유로운 공간, 한가한 시간.

크로와상과 카페 알롱제(Cafe Allonge) 추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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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1층 가이드 /@Louvre Museum Map